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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사 및 고대국가 시대


도봉구 지역 일대에 사람이 거주하기 시작한 것은 선사시대로 추정되나 아직 선사시대의 유적이나 흔적은 발견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이 지역은 넓은 의미에서 한강유역 서울의 일부라는 점에서 한강변 선사 문화권에 포함될 수 있을 것이다. 

한강 하류의 서울 지역은 일찍이 삼국세력의 각축장이 되었던 곳이며, 구체적으로 역사의 무대에 등장한 시기는 백제가 고대국가 체제를 갖추면서 한강 중심의 통치구역에서 점차 남북으로 영토를 넓혀갈 무렵인 백제 제8대 고이왕(古爾王 ? ∼ 286) 때로 알려지고 있다. 고대사회에서 군사적 요충지이며 농업생산 활동을 위한 필수조건인 배산임수의 지형이 잘 발달한 우리 구 지역은 그 특성으로 인하여 각국의 선점노력이 경주된 곳이기도 하다.

그 후 이 지역은 백제의 한성시대를 지나 장수왕의 남하정책에 의해 한강유역 일대가 고구려의 영토에 들어가고 고구려는 군현제에 따라 현재의 도봉구, 양주시 일대의 새로운 점령지에 매성군(일명 창화)을 설치하였다. 이후 백제를 거쳐 신라 경덕왕 16년(757년)에는 현 도봉구 지역을 포함한 양주시 일대에 내소군을 설치하였다.




고려 및 조선시대

고려 태조는 이 내소군을 견주라 개칭하고 신라 때의 한양군을 양주라 고쳐 양주에 주지사를 두어 견주를 관할케 하였고, 현종 9년(1081년)에는 견주를 양주에 편입하였다.

조선 태조 3년(1394년)에는 양주고을 범위 내에서 도읍〔한성부〕을 정하고 현 도봉구 지역을 포함한 기타 양주 지역은 그대로 양주로 속하게 하였고, 2년 후인 1396년에는 한성부의 5부 방리명(坊里名)을 정하여 경계표석을 세웠는데 이 때 도봉구 일부 지역은 동부 숭신방(崇信坊)에 속하였다.

따라서, 도봉구의 일부 지역은 조선시대부터 한성부의 성외 지역이 되어왔던 것을 알 수 있으며, 영조 때 각 도읍지(道邑誌)를 모아 편찬한『여지도서』를 보면 도봉구 지역인 노원면과 해등촌면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근대 및 현대

고종 32년(1895년)에는 한성부 소속의 양주군은 칙령에 의거 13도제에 따라 경기도의 3등군이 된다. 이후 일제 강점기인 1912년경 노원면과 해등촌면은 양주군에 계속 속해 있다가 2년 후인 1914년 노원면과 해등촌면이 노원면으로 통합하게 되는데 창동, 도봉, 방학, 쌍문리 등의 우리 구 전체 지명이 비로소 나타나게 된다. 

해방 4년 후인 1949년 8월 13일 서울의 행정구역이 확장됨에 따라 고양군 숭인면에서 새로 편입된 지역과 동대문구 일부 지역을 합하여 성북구로 편입하였고, 도봉구 지역은 숭인 출장소가 관할하게 된다. 1963년 1월 1일 양주군 노해면에 속해있던 지역이 성북구에 편입되고 성북구 노해출장소가 설치되어 도봉, 방학, 쌍문, 창동리 등을 관할하게 되었다.

그 후 1973년 7월 1일에는 숭인출장소와 노해출장소 관할지역을 합하여 22개 행정동을 관할하는 도봉구를 신설하였다. 이후 분동을 거듭하여 1979년에는 35개 행정동으로 규모가 증가되었고, 1988년 1월 1일 도봉구에서 노원구가 분리되었고, 1995년 3월 1일에는 도봉구에서 미아, 수유, 번동의 18개동이 강북구로 분리되었으며 쌍문, 방학, 창, 도봉동의 14개 동이 현재의 도봉구를 이루게 되었다.


도봉구의 발자취

고대ㆍ삼한시대 마한 50개 소국중 고리국(高離國)때부터 역사의 무대에 등장
ㆍ백제 온조왕 하북위례성
757ㆍ신라 경덕왕 때 현(現) 도봉구 지역을 포함 양주시 일대 내소군(來蘇郡) 설치
고려ㆍ태조 내소군을 견주(見州)로 개칭
ㆍ현종 9년 견주를 양주에 편입
조선1396ㆍ태조 한성부의 5부 방리명을 정하여 현 강북구 지역이 동부 숭인방에 속함
    - 영조“與地圖書”에 도봉구 지역인 노원면(蘆原面)과 해등촌면(海等村面) 첫기록  
    ※ 조선시대 : 경기도 양주목(楊州牧)
근대1914ㆍ일제의 지방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쌍문 방학 창 도봉동 지역은  양주군 노해면으로, 미아 번 수유 지역은 고양군 숭인면으로 편입.
1949ㆍ【대통령령 제159호】경기도 고양군 숭인면 지역이 성북구에 편입.
ㆍ(숭인출장소 설치 후 도봉지역 관할 - 쌍문, 방학, 창, 도봉동)
현대1973. 7. 1ㆍ【대통령령 제6548호】성북구로부터 도봉구 분구 신설(21개동)
ㆍ〔시조례 제784호〕수유3동 신설(21개동→22개동)
1975. 10. 1ㆍ【대통령령 제7816호】구 관할 변경
ㆍ도봉구 미아동 일부를 성북구에 편입
ㆍ성북구 정릉동, 하월곡동 각 일부를 도봉구에 편입
ㆍ〔시조례 제979호〕동 명칭 및 구역 획정
ㆍ정릉동 하월곡동 일부를 미아동에 편입
ㆍ〔시조례 제981호〕동 명칭과 관할구역 변경(22개동→24개동)
1977. 9. 1ㆍ〔시조례 제1181호〕미아8,번2,수유5,창2,도봉2동 증설(24개동→29개동)
1979. 10. 1ㆍ〔시조례 제1362호〕동 명칭 및 구역 획정(창동 일부를 쌍문동에 편입)
1980. 7. 1ㆍ〔시조례 제1413호〕동사무소 신설(29개동→35개동)
1985. 9. 1ㆍ〔시조례 제2015호〕상계5동 신설(35개동→36개동)
1988. 1.1ㆍ【대통령령 제12367호】도봉구로부터 노원구 분구신설
ㆍ도봉구 창동 도봉동 상계동 중계동 하계동 일부를 노원구에 편입
ㆍ〔시조례 제2251호〕동명칭 및 구역획정 변경(36개동→20개동)
1988. 7. 1ㆍ<구조례 제59호>방학3동 신설(20개동→21개동)
1989. 1. 1ㆍ【대통령령 제12557호】자치구 관할구역 변경
ㆍ노원구 창동, 도봉구 일원과 월계동 일부를 도봉구에 편입(26개동→27개동)
1989. 6. 1ㆍ<구조례 제88호> 창4동 신설(26개동→27개동)
1991. 9. 1ㆍ<구조례 제164호> 미아9동 번3동 쌍문4동 창5동 신설(27개동→33개동)
1994. 11. 1ㆍ<구조례 제270호> 수유6동 방학4동 신설(31개동→33개동)
1994. 12.26ㆍ【대통령령 제14434호】자치구 관할구역 변경
ㆍ도봉구 창동 일부를 노원구에 편입
ㆍ도봉구 번동 일부를 성북구에 편입
1995. 3. 1ㆍ【법률 제4802호】도봉구로부터 강북구 분구 신설(33개동→15개동)
ㆍ미아동 번동 일원과 수유동 우이동 쌍문동 일부를 신설구인 강북구에 편입
1995. 4. 20ㆍ【대통령령 제14629호】도봉구 쌍문동과 강북구 우이동 일부 간 상계 조정
2008. 2. 18ㆍ방학3, 4동 통합으로 14개동으로 구성





도봉구의 유래

도봉구는 동쪽으로 노원구, 서쪽으로 강북구, 북쪽으로 의정부시와 경계를 이루고 있는 서울 동북부의 관문으로 면적은 20.842㎢로 이중 북한산 국립공원을 비롯한 공원면적이 구면적의 52.5%에 달한다. 도봉구의 서남부로 흐르는 우이천은 강북구와 경계를 이루어 흐르고, 북부로는 의정부시와 경계를 이루는 도봉산이, 동부는 한강상류 지류인 중랑천이 흐르고 있다. 

도봉구의 상징인 도봉산은 태백산맥에서 뻗어 내려온 광주산맥의 한 봉우리로서 예로부터 서울의 진산으로 사랑받아 왔으며 산 전체가 웅장한 바위로 이루어져 드높은 화강암 벽이 흰 빛을 뽐내며 공중에 솟아 변함없는 지조와 의리의 상징으로 서울을 굽어보고 있다.

도봉산은 최고봉인 자운봉(紫雲峰)이 망월사 뒤편에 위치하고 있고, 천축사 뒤편에 위치한 만장봉(萬丈峰), 바위 봉우리가 기둥처럼 솟아있는 주봉(柱峰), 그밖에 선인봉(仙人峰), 오봉(五峰) 등이 연이어 있어, 승천하는 용의 기세 같기도 하고, 혹은 거북 모양 같기도 하여 보는 이로 하여금 탄성을 불러일으키는 명산으로 천만 서울 시민이 즐겨 찾는 휴식처이다.

1973년 7월 1일 성북구에서 분리 신설될 당시 서울의 대표적인 명산이자 우리 지역의 상징인 도봉산 이름을 따서 도봉구라고 하였다.


동명유래


쌍문동

쌍문동 동명(洞名)의 유래는 몇 가지가 전해온다.하나는 현 쌍문동 286번지 근처에 계성(鷄聲)이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계성과 그 부인이 이름 모를 병으로 세상을 떠나자 그 아들이 생시에 부모를 정성껏 모시지 못한 것을 후회하여 부모의 묘 앞에 움집을 짓고 여러 해 동안 기거하다가 죽자 마을 사람들이 그의 효성을 지극히 여겨 그의 묘 근처에 효자문(孝子門)을 두 개 세운 데서 쌍문(雙門)이라는 지명이 유래했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옛날에는 현 창동 우체국 부근에 열녀문이 두 개 있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하며 또 쌍갈래 길에 이문(里門)이 있었으므로 ‘쌍갈무늬’가 쌍문으로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최근에는 ‘쌍문(雙門)’은 효자문(孝子門)이 두 개라 쌍문이라 한 것인데, 효자 남궁지와 그의 처 하동 정씨(鄭氏), 그의 아들 효자 남궁 조 부자가 고종으로부터 효자문을 받았는데 부자(父子)의 묘소가 노해파출소(옛 쌍문동 중심지)에서 볼 때 남과 북에 있어 ‘쌍문’이라 하였다는 이야기도 있다.

조선시대에는 경기도 양주목 해등촌면에 속하였으며, 1912년에 편찬된 『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경기도편에 나타나는 양주군 해등촌면 12개 리 가운데 소라리(所蘿里)·계성리(鷄聲里)지역에 해당한다. 1914년 노원면과 해등촌면이 통합되어 노해면이 설치되었을 때 소라리·계성리가 통합되면서 쌍문리라는 지명이 처음 나타났다. 

1963년 1월 1일 경기도 양주군 노해면이 서울시 성북구 노해 출장소에 편입되면서 쌍문리는 창동 동사무소 관할 하에 있었다. 1973년 성북구에서 도봉구가 분리 신설되면서 도봉구에 편입되었으며, 법정동인 이 동은 행정동인 쌍문1∼4동으로 이루어져 있다.

1960년 이전까지 주민들은 대부분 농업을 위주로 하고 있었으며, 그 후 인구가 급증하기 시작하여 쌍문로와 도봉로 주위에는 상가가 밀집되어 있다. 자연마을로 계성동, 쇠죽골, 해등천 등이 있었는데, 이 마을들이 합쳐져 동을 형성하였다.  


방학동

방학동 동명의 유래에 관해서는 도봉서원(道峯書院)의 창건과 관련하여 조선시대 어느 임금이 도봉서원의 터를 정하기 위하여 도봉산 중턱에 앉아 있다가 학(鶴)이 평화롭게 놀고 있는 것을 보고 방학(放鶴)이라 하였다는 이야기와 이 곳 지형이 학이 알을 품고 있는 것 같다고 하여 방학(放鶴)이라고 하였다는 이야기가 있으나, 학(鶴)과 관련된 전설은 아마도 한자(漢字)로 방학리(放鶴里)란 지명이 이루어진 후에 덧붙여진 이야기로 보인다.

또한 곡식을 찧는 기구인 방아가 있는 곳이라는 의미에서 우리말로 ‘방아골(굴)’로 불리던 것을 한자로 기록하는 과정에서 음이 비슷한 방학리(放鶴里)로 고쳤다는 이야기도 있다. 최근에는 방학동의 원래 이름은 암회리(岩回里)였는데, 도봉산 줄기가 동남방으로 뻗어 내려오다가 다시 되돌아와 암회리라 했던 것을 학(鶴)이 날아가는 형국의 지세로 보아 풍수지리가의 조언으로 일제시대 ‘방학(放鶴)’이라 작명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조선시대에는 경기도 양주목 해등촌면 지역이었고, 1914년 노해면 방학리로 되었다. 1963년 서울시 성북구에 편입되면서 방학동으로 되었고 1973년 도봉구 관할로 되었다. 1975년 도봉동에서 분동되었으며 1980년 방학1·2동으로 분동, 1988년 2동이 다시 2·3동으로 분동되었고 1994년 3동이 4동으로 분동되었다가 2008년에 4동이 3동으로 통합되었다. 현재 법정동인 방학동은 행정동인 방학1∼3동으로 이루어져 있다.

교통은 방학로가 마을의 중심을 지나며, 성북구에서 의정부시로 나가는 도봉로가 동쪽으로 지나고 있다. 예로부터 도심에서 멀지 않은 지역이어서 북한산 자락에는 왕실과 귀족들의 묘소가 많이 있다.


창동

창동 동명의 유래는 조선시대 이 곳에 양곡 창고가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것이다. 창동초등학교 옆 공터에는 오랜 옛날부터 창동리(倉洞里)라는 돌로 제작된 이정표가 세워졌었는데, 1995년 9월 1일 구 창5동 주민센터(창동 700-7) 옆으로 이전하였다.

도봉구의 남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동쪽은 중랑천을 경계로 노원구 상계동, 서쪽은 쌍문동, 남쪽은 강북구 번동, 북쪽은 방학동과 접해 있다. 창골·유만(流滿)·말미·모랫말 등의 자연마을이 합쳐 창동을 형성하였다. 

조선시대에는 경기도 양주목 해등촌면에 속하였는데, 1912년에 편찬된 『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경기도편에 나타나는 양주군 해등촌면 12개 리 가운데 창동리(倉洞里)·마산리(馬山里)·유만리(流滿里) 지역에 해당한다. 이 후 1914년 4월 1일 전국의 부(府)·군(郡)을 통폐합할 때 노원면과 해등촌면을 합쳐 노해면을 만들면서, 노해면 내에 도봉리·방학리·쌍문리·창동리·월계리·공덕리·하계리·중계리·상계리·등 9개리를 설치하였는데 이때 종래 해등촌면의 마산리·유만리·창동리를 합하여 창동리라 하였다.  1963년 노해면이 서울시 성북구에 편입되면서 창동이 되었고, 1973년 도봉구로 편입 되었다. 1988년 노원구로 편입되었다가 1989년 다시 도봉구로 편입되어 오늘에 이르고 되었다.

창동 일대는 쌍문동과 함께 신석기시대에서 청동기시대에 이르는 토기, 석기, 간석기 등의 유물이 8·15 광복 전 일본인들에 의해 발견된 것으로 보아, 신석기시대부터 마을의 유래가 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도봉동

도봉동 동명의 유래는 서울의 명산인 도봉산 아래 있어 얻어진 이름이다.

조선시대에는 경기도 양주목 해등촌면에 속하였는데 1912년에 편찬된 『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경기도편에 나타나는 양주군 해등촌면 12개리 가운데 상누원리 무수동 영국리 지역에 해당한다. 1914년 4월 1일 전국의 부(府)·군(郡)을 통폐합할 때 노원면과 해등촌면을 합쳐 노해면을 만들면서 노해면내에 도봉리 방학리·쌍문리·창동리·월계리·공덕리·하계리·중계리·상계리 등 9개리를 설치하였는데 이때 종래 해등촌면의 상누원리·무수동·영국리를 합하여 처음으로 도봉리라 하였다. 1963년 성북구에 편입되면서 도봉동으로 되었고, 1973년 도봉구 관할로 되었다. 1975년 도봉동에서 방학동이 분동되어 나갔고, 1977년 도봉1·2동으로 분동되었다. 1988년 노원구로 편입되었으나, 1989년 다시 도봉구로 편입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동북쪽으로는 시가지가 조성되어 있고, 남서쪽으로 도봉산과 북한산의 연봉을 따라 봉우리와 구릉 지대가 많고 맑은 계곡이 곳곳에 있어 자연 경관이 아름답다. 동쪽은 한천을 경계로 상계동과 접하며, 서쪽의 경기도 양주군, 남쪽의 방학동, 북쪽의 경기도 의정부시와 접해 있다. 

자연마을로는 다락원, 서원말, 무수울, 웃다락원 등이 있다. 다락원과 웃다락원은 의정부시와의 인접지역에 조선시대에 공무로 출장하던 사람들이 묵던 원(院)이 있었고, 그 원집에 다락, 즉 누각이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지명유래


쌍문동

  • 쇠죽골 :쌍문1동 내시 묘가 있는 아랫마을. 동대문 시장에 소를 매매하러 가기위해 시골에서 올라온 소장수들이 이곳에서 쇠죽을 먹였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으로 소여물골이라고도 불렀다고 한다.
  • 제성겻 :계성과 그의 효성 지극한 아들이 살았다는 마을. 쌍문제1동에 해당한다.
  • 해등천 :현 쌍문제2동에 해당되는 지역으로 소군래라는 하천에서 깨끗한 물이 이 마을을 거쳐 방학동으로 흘렀는데, 물이 바닷물처럼 맑아서 해등천이라 불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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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학동

  • 박수겻고개 : 쌍문리에 있는 고개
  • 가살피 : 방학동과 도봉동과의 경계지점에 있는 마을
  • 금성윗돌 : 방학굴 앞에 있는 들
  • 도당마을 :현재 방학 3동 신동아 4차 아파트 단지 일대로 도봉산자락에 복숭아꽃, 오얏꽃 등 이 만발하는 평화로운 마을로 국태민안한 요순 시대를 방불케 하여 요 임금의 칭호인 제요도당씨(帝堯陶唐氏)에서 '도당'이라는 글자를 따서 도당마을이라 하였다고 한다.
  • 금잇들 : 방학동 도당마을 앞에 있는 들. 거머리가 많았다고 한다.
  • 논굴재 : 방학굴에 있는 고개
  • 복개내 : 방학동에서 중랑천으로 들어가는 내. 한자로는 '福開川'
  • 생잇돌 : 도당마을 앞에 있는 들
  • 성고개 : 바위가 성(城)과 같은 고개 밑에 있는 마을. 바위를 돌아 들어간다 하여 암회리(岩回 里)라고도 이름하였다.
  • 시루봉 : 방학동 도당마을 뒤에 있는 봉우리. 모양이 시루같다.
  • 원당이 : 소원을 비는 신당(神堂)이 있어서 생긴 이름. 한자로 '元唐里'
  • 초당마을 : 초당(草堂)이 있었던 마을
  • 황소바윗굴 : 방학굴에 있는 골짜기. 모양이 황소같은 바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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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동

  • 말미 : 옛날 산에다 말을 많이 먹였다 해서 붙여진 이름, 한자는 마산동(馬山洞)
  • 모랫마을 : 창1동과 월계동과의 경계지역에 모래가 많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
  • 방줏굴 : 방죽이 있는 마을
  • 배라깃들 :수원(水源)이 적어 날씨가 가물면 하늘만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 창동 292번지, 300번지 일대에 해당한다.
  • 삼봉못(三峰못) : 부근에 삼각산의 봉우리가 비쳤다는 연못
  • 유만이(流滿里) : 큰 늪이 있어 물이 가득하였던 데서 연유한다. 일명 한내(漢內)
  • 종자들 : 유만이 앞에 있는 들. 7년을 가물어도 물이 있어 메마르지 않았다고 한다.
  • 창골 : 조선시대 창고가 있었던 데서 연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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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봉동

  • 다락원 : 다락으로 된 원(阮)이 있었다. 한자로는 누원(樓阮)이라고 한다.
  • 도당재 : 굿을 하는 신당이 있는 고개
  • 뒷굴 : 도봉서원 뒤에 이는 골짜기
  • 서원말 : 도봉서원이 있는 마을
  • 서원내 : 도봉서원 앞에서 흐르는 시냇물의 이름을 따라 마을 이름이 생겨났다. 한자로는 書阮 川洞이라고 한다.
  • 서낭당 : 무수울의 다른 이름. 서낭당이 있었다.
  • 무수울 :도봉동 104번지 일대로 마을 이름의 유래는 약 500여년 전에는 수철동(水鐵) 일명 무 쇠골이라 하였고, 이후 무수동(無愁洞)이라 개칭하였는데 그 연유는 영해군 묘소 형국이 선인무수지형(仙人舞袖之形)으로 신선이 소매를 펼치고 춤을 추는 형국이라 하여 무수동(無愁洞)이라 호칭을 했다. 또한 서낭당이 있는 마을이라고 하여 생겼다는 설과 세종이 재위시 이 곳에 왔다가 원터(도봉동 578번지) 약수터의 물을 마시고 물 좋고 풍광 좋은 이 곳이야말로 아무런 근심이 없는 곳이라고 하여 무수골로 칭해졌다는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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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God Se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