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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0부터1700년대 인물


조광조

정암 조광조 1482 ~ 1519

중종(中宗)때 도학자이며 진보적 정치가, 자는 효직(孝直), 호는 정암(靜庵), 본관은 한양(漢陽)이다. 한성에서 출생하였으며 개국공신 온(溫)의 5대 손으로, 감찰 원강(元綱)의 아들이다. 17세 때 어천찰방(魚川察訪)으로 부임하는 아버지를 따라가, 무오사화로 화를 입고 희천에 유배중이던 김굉필에게 수학하였다. 학문은 『소학(小學)』·『근사록(近思錄)』등을 토대로 하여 이를 경전 연구에 응용하였으며, 이때부터 성리학 연구에 힘써 김종직의 학통을 이은 사림파의 영수가 되었다. 1510년(중종5) 사마시에 장원으로 합격, 진사가 되어 성균관에 들어가 공부하였다. 1515년(중종10) 조지서사시(造紙署司紙)라는 관직에 초임되었다. 그 해 가을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전적·감찰·예조좌랑을 역임하게 되었고, 이 때부터 왕의 두터운 신임을 얻게 되었다. 그는 유교로써 정치와 교화의 근본을 삼아야 한다는 지치주의(至治主義)에 입각한 왕도정치의 실현을 역설하였다. 주자학이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은 고려말이었으나 널리 보급되지는 못하였고, 조선 초기에 와서도 사장(詞章)의 학만이 높이 숭상되었기 때문에 과거에 있어서도 이것에만 치중하였고 도학(道學)은 일반적으로 경시되었다. 그러나 조광조의 도학정치에 대한 주창은 대단한 것이었고, 이러한 주창을 계기로 하여 당시의 학풍은 변화되어 갔으며, 뒤에 이황·이이 같은 학자가 탄생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의 도학정치는 조선시대의 풍습과 사상을 유교식으로 바꾸어 놓는 데 있어서 중요한 동기가 되었다. 관직은 대사헌(大司憲)으로 조선 중종(中宗) 때 성리학자(性理學者)요, 대유학자(大儒學者)이다. 삼사(三司)를 두루 거쳐 훈구세력의 부정을 척결하는 혁신 정치이념으로 유교적 도덕국가, 요순시대의 이상국가 건설을 목표로 도학(道學)에 의한 개혁정치를 단행하였다. 그러나 훈구파가 사림파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을 단행하는 기묘사화(己卯士禍)를 일으킴에 따라 능주에 유배되었다가 사사되었다. 후일 사림파의 승리에 따라 선조 초에 신원되어 영의정으로 추증되고 문묘에 종사되었으며 서원과 사당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정암집』이 있는데 그 중 대부분은 소(疏) · 책(策) · 계(啓) 등의 상소문과 몇 가지의 제문이고, 그 밖에 몇 편의 시도 실려 있다.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그의 사후에 그의 학문과 인격을 흠모하는 후학들에 의하여 사당이 세워지고, 서원도 설립되었다. 1570년 능주에 죽수서원, 1576년 희천에 양현사가 세워져 봉안되었으며, 1605년(선조 38)에는 그의 묘소 아래에 있는 심곡서원에 봉안되는 등 전국에 많은 향사가 세워졌다. 조광조는 젊었을 때 도봉산의 경치를 몹시 좋아하여, 심지어 조정에서 공무를 마치면 찾아가 놀기도 하였다고 한다. 도봉서원은 그가 평소에 즐겨 찾던 도봉산 골짜기에 그의 인격을 흠모하는 지방유생들과 남언경목사가 건립하고 배향하였다.


송시열

우암 송시열 1607 ~ 1689

본관은 은진(恩津), 호는 우암(尤庵) 또는 우재(尤齋).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충청북도 옥천에서 태어나 사계 김장생으로부터 학문을 배웠으며, 봉림대군(효종)의 스승이요, 정암 조광조의 학통과 율곡 이이의 학설을 이어받았다. 정계에서 은퇴하고 청주 화양동에서 은거생활을 하였는데 1689년 왕세자가 책봉되자 이를 시기상조라 하여 반대하는 상소를 했다가 제주에 안치되고 이어 국문(鞠問)을 받기 위해 서울로 오는 도중 정읍(井邑)에서 사사(賜死)되었다. 1694년 갑술옥사(甲戌獄事) 뒤에 신원(伸寃)되었다. 주자학의 대가로서 이이의 학통을 계승하여 기호학파의 주류를 이루었으며 이황의 이원론적인 이기호발설을 배격하고 이이의 기발이승일도설을지지, 사단칠정이 모두 이라 하여 일원론적 사상을 발전시켰으며 예론에도 밝았다. 성격이 과격하여 정적이 많았으나 그의 문하에서 많은 인재가 배출되었으며 글씨에도 일가를 이루었다. 문묘·효종묘를 비롯하여 청주의 화양서원, 여주의 대로사, 수원의 매곡서원 등 전국 각지의 많은 서원에 배향되었다. 영의정으로 추증되었으며, 저서로는 『주자대전차의』,『주자어류소분』등 다수가 간행되었으며, 사후(死後)의 문집으로는 『우암집』,『송자대전』등이 출간되었다.


안맹담(安孟聃, 1415-1462)

본관은 죽산(竹山), 자는 덕수(德壽), 시호는 양효, 함길도 관찰사 망지의 아들이다. 1428년 세종의 둘째딸 정의공주와 결혼하여 죽성군에 봉해졌고, 1432년 다시 연창군에 봉해졌다. 뒤에 연창위에 개봉되었으며, 세조 원년(1445)에는 원종공신 1등에 책록되고 수록대부에 올랐다. 글씨에 뛰어나 초서를 잘 썼으며, 말 타기, 활 쏘기 등 무예에도 뛰어나 수양대군과 가까이 지내기도 하였다. 사어(射御)를 잘 하였으며 음률(音律) ·약물(藥物)에도 밝았다. 그의 아들 안상계는 돈령도정을 지냈는데, 단종 문제로 세상이 어수선하자 저자동에 조용히 머물렀고 김종직·남효온과 친교가 있었으며 세조의 조정에 출사하지 않았다 한다. 도봉구 방학동 산63번지에 묘와 신도비가 있다.


정의공주(貞懿公主, ? ~ 1477)

정의공주는 조선의 공주로, 세종대왕과 소헌왕후 심씨의 차녀이며, 문종의 누이동생이자 세조의 누나이다. 세종대왕으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으며 자란 정의공주는 1428년 죽산 안씨 안맹담과 결혼을 하였다. 정의공주는 한글창제에 있어 변음과 토착음에 대한 연구로 지방 사투리를 표준말로 변환, 모든 백성이 한 책을 보고 한 마음을 갖도록 하는데 크게 공헌하여 세종대왕께서 특별히 상으로 정의공주에게 노비 수백을 하사하였다.

<소설 정의공주(한소진 저) 중에서 일부 수록>

『정의는 솔직히 이두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생각이니 마음이니 다 아름다운 우리 말인데 무엇때문에 거기에 한자의 의미를 더해야 하는가? 그냥 그대로 두면 안되는 것인가? 우리 백성들은 흥과 눈물이 많아서 행복할 때는 하늘이 떠나갈 듯 즐겁게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고 울다가도 갑자기 힘을 내는 백성이거늘 어찌 그 마음에 악마의 음침한 기운이 들어간다 하겠는가? 백성들의 삶을 한자가 억지로 틀어막고 있습니다. 한자도 어렵지만 이두는 더욱 어려워 우리 백성들은 정말 힘든 삶을 살고 있다 들었습니다. 그러니 저희들이라도 우리 말을 한자로 풀이하려 들지 말고 글을 만들어서 백성들에게 힘을 실어줘야 하지 않을는지요?” “이두로 사람을 ‘四覽’이라고도 표현한다지요? 사방을 둘러본다는 뜻이겠지요. 그것은 아름다운 말인 듯합니다. 아름다운 말도 수없이 많을 것입니다. 제 생각은 한자를 빌어 이두로 쓸 때조차도 조상들은 의미에 의미를 더하느라 몹시 골머리를 앓았을 것이라는 뜻입니다.”라고 하였다.
세종은 가슴이 벅차 올랐다. 그것은 자신이 언제나 품고 있던 생각이었다. 우리 백성의 혼은 중국인의 혼과 다르다. 정의의 말대로 우리글을 만드는 것이야말로 자신의 치세에 반드시 해야 할 일이었다.
“아바마마, 한시를 쓸 때마다 저는 참으로 답답함을 느끼옵니다. 비둘기는 구구하며 우는데 어찌 한자로 관관(關關)이라 표기해야만 하나요? 시경에 관관저구 재하지주(關關雎鳩 在河之洲)라는 시구가 있습니다. 노래하는 한 쌍의 비둘기, 황하의 물가에서 노는구나----. 소녀, 귀한 종이를 밤새 구겨버리고 만 것은 마음과 글자가 합치되지 않는 남의 글로 언니 곁에 가자니 마음이 쓰라려 그랬습니다.” 라고 하자, 세종은 “정의는 낙천정에서 하늘의 뜻을 알고 천지를 감동시켜 세상을 기쁘게 하는 일을 하라. 과인의 말이 무슨 말인지 알겠는고?” 라고 명하였다. 우리말을 한자가 대신할 수 없다는 정의의 말은 백성들의 한탄과도 같은 것이었다. 어서 빨리 이 슬픔으로부터 벗어나지 않으면 안된다는 마음의 울림이 세종의 온 몸으로 퍼져갔다.

--- 중략 ---

이윽고 우리글 창제 선포를 앞두고 세종은 모두를 불러 최종적으로 점검했다. 우리 문자는 인간을 중심으로 음양을 다 감싸 안을 수 있는 소리글로 만들어졌다고 하였다. 수양도 감격에 겨워 아바마마께서 ‘ㄱ’은 하늘이 인간에게 흘러 내려오니 ‘그냥, 그대로, 그렇게’의 의미를 지닌 가장 자연스러운 글자라 하셨고 ‘ㄴ’은 땅으로부터 인간이 솟아오르니 ‘나다(生)’를 기본으로 하며, ‘ㄷ’은 사람이 땅과 하늘을 안고 있으니 ‘다함’을 뜻하고, ‘ㅁ’은 ‘ㄱ’과 ‘ㄴ’을 합쳐 완성된 ‘모두’를 의미하며, ‘ㄹ’은 하늘과 땅, 인간이 완벽하게 조화하여 ‘어우르’는 철학이 숨겨져 있다고 하며, ‘ㅂ’만 봐도 인간이 하늘과 땅을 지켜보는 형상으로 ‘본다’는 속 뜻을 갖게 되며, ‘ㅇ’은 우주를 뜻하여 어느 나라에도 없는 사념이니 이는 조선만이 갖고 있는 독특한 글자라 하시니 그 해석이 놀라울 따름이라며 백성들이 빠르게 우리 글자를 배울 수 있을 것이라고 힘차게 말하였다. 정의는 귀신도 한자는 부수와 획수가 너무 많아 학자들도 다 배우지 못하나 우리글은 가로선과 세로선, /와 \, ‘ㅇ’그리고 ‘․’ 등 여섯 개의 모형만 있으면 만 가지도 넘는 무궁무진한 글자를 만들어 낼 수 있으며 그것으로 모든 말을 다 표기할 수 있으니 가히 귀신도 알아볼 글자가 아닌가? 모두 세종께서 음운과 음성학뿐 아니라 하늘과 땅, 인간을 우리 문자에 적용한 덕분으로 모든 글자를 소리내어 말할 수 있으니 사람 사는 곳이라면 어디든, 누구든, 천지 자연의 소리를 그대로 사용하여 서로의 생각을 펼칠 수 있는 일이라 하면서 감격, 또 감격하였다. 그로써 모든 일이 끝났다.』

이인(李仁, 1465 ~ 1507)

자는 자정(子靜)이며, 세종의 9남 영해군의 아들로, 1474년 영춘군(永春君)에 봉해졌다. 연산군 때 아들 완천부정(完川副正) 기(祺)의 사건에 연좌되어 부자·형제가 모두 유배당하였으며, 그는 남해(南海)로 유배되었다. 1506년 중종반정으로 풀려나 복직되고 정국원종공신(靖國原從功臣)이 되었다. 매사에 부지런하고 신중했으며, 특히 상례(喪禮)를 잘하여 종친으로부터 칭찬을 들었다. 묘는 도봉산 기슭 무수골(도봉1동 산 82-1)에 있다. 이 곳은 그의 부(父)인 영해군의 묘와 그의 동생인 길안군 및 아들인 완천군과 강녕군의 묘가 같이 있으며 현재 이 마을에는 영해군의 후손들이 이 고장을 지키고 있다. 신도비는 서울특별시유형문화재 제106호로 지정되었다.


남언경(南彦經, ?-?)

본관 의령(宜寧). 호 동강(東岡).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학자로서 1566년(명종 21) 학행(學行)으로 천거되어 지평현감(砥平縣監)에 기용되고, 1573년(선조 6) 양주목사(楊州牧使)를 지냈다. 1589년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으로 탄핵받아 파직되었다가 1592년 여주목사(驪州牧使)에 다시 기용되어, 이듬해 공조참의(工曹參議)를 역임하였다. 이요(李瑤)와 함께 조선 최초의 양명학자(陽明學者)로서 이황(李滉)을 비판했다는 주자학파의 탄핵으로 삭탈관직되었다. 양주목사 재임시 1573년(선조 6) 도봉산 영국사 절터에 도봉서원(道峯書院)을 창건하였다.


유희경(劉希慶, 1545~1636)

조선 중기의 시인으로 본관은 강화(江華), 자는 응길(應吉), 호는 촌은(村隱)이다.허균(許筠)의 《성수시화(惺叟詩話)》에서 천인으로서 한시에 능통한 사람으로 꼽았다. 13세에 부친상을 당하자 하루도 떠나지 않고 시묘(侍墓)하고 편모를 극진히 공양했다. 서경덕의 문인이었던 남언경에게 문공가례(文公家禮)를 배워 상례에 특히 밝았으므로 국상이나 사대부가의 상(喪)에 집례하는 것으로 이름이 났다. 박순(朴淳)으로부터 당시(唐詩)를 배웠다. 어려서부터 효자로 이름이 났으며, 임진왜란 때에는 의병으로 나가 싸운 공으로 선조로부터 포상과 교지를 받았다. 사신들의 잦은 왕래로 호조의 비용이 고갈되자 그가 계책을 일러주었으므로 그 공로로 통정대부(通政大夫)를 하사받았다.

광해군 때에 이이첨(李爾瞻)이 모후를 폐하려고 그에게 소(疏)를 올리라고 협박하였으나 거절하고 따르지 않았다. 인조가 반정한 뒤에 그 절의를 칭송하여 가선대부(嘉善大夫)로 품계를 올려주었고, 80세 때 가의대부(嘉義大夫)를 제수받았다. 그는 한시를 잘 지어 당시의 사대부들과 교유하였는데 당시 같은 천인신분으로 시에 능하였던 백대붕(白大鵬)과 함께 풍월향도(風月香徒)라는 모임을 만들어 주도하여 위항문학의 선구자가 되었고, 이 모임에는 박계강(朴繼姜)·정치(鄭致)·최기남(崔奇男) 등 중인신분을 가진 시인들이 참여하였다. 그의 시는 한가롭고 담담하여 당시에 가깝다는 평을 듣는다. 유희경은 서경덕의 문인으로 도봉서원을 건립하고 남언경이 사액을 받은 곳으로 1623년에 도봉서원 옆 영국동 집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말년에 시를 지으며 도봉서원 앞 계곡에서 풍류를 즐겼다. 뒤에 아들 일민(逸民)의 원종훈(原從勳)으로 인하여 자헌대부 한성판윤(資憲大夫漢城判尹)에 추증되었다. 저서로 《촌은집》 3권과 《상례초(喪禮抄)》가 전한다.

촌은 유희경과 매창이야기

  • 서러운 만남
    동인과 서인의 정쟁은 극에 달했다. 1591년 이른 봄, 유희경(劉希慶, 1545∼1636)은 서울을 떠나 남으로 향했다. 도탄에 빠진 백성과 전운이 감도는 나라를 걱정하며 또한 잊으려 했는지도 모른다. 국상이나 사대부상에 자주 불려 다니며 상례를 집행하던 중인의 신분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자괴감 역시 그를 기방(妓房)으로 내몰았을 것이다. 
    침류대를 중심으로 백대붕과 함께 풍월향도 시단을 이끌었던 위항문학의 선구자 유희경은 천리길을 내려와 부안 기생 이매창(李梅窓, 1573∼1610)을 만났다. 당시 나이 마흔여덟 살의 유희경은 스물의 기녀를 본 순간 사랑에 빠지고 만다. 서울에서부터 매창에 대해 들어 왔는지라 스물여덟의 나이 차이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촌은과 매창은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깊은 사랑에 빠지고 말았다. 촌은은 매창을 처음 만난 날 「증계량(贈癸娘)」이라는 칠언절구를 바쳤다.

        曾聞南國癸娘名(증문남국계랑명) 일찍이 남국의 계랑이라는 이름 들었는데 
        詩韻歌詞動洛城(시운가사동락성) 싯구와 노래솜씨 서울에까지 진동했지
        今日相看眞面目(금일상간진면목) 오늘 만나 진면목 대하고 보니 
        却疑神女下三淸(각의신녀하삼청) 무산 신녀가 삼청(三淸)에 내려온 듯하여라 

    열 살 때부터 시를 쓰기 시작한 매창은 이미 서울까지 알려진 기생 시인이었다. 촌은은 매창을 무산의 신녀에 비유하면서 극찬하고 있다. 초회왕이 무산에서 낮잠을 자고 있을 때 꿈 속에 신녀가 나타나 교합했다는 신녀는 시집도 가기 전에 죽은 한을 풀기 위해 아침에는 구름이 되고 저녁에는 비가 된다고 한다. 그 신녀가 도가에서 말하는 신선이 사는 삼청인 옥청(玉淸), 상청(上淸), 태청(太淸)에 내려온 듯하다고 표현하였다.

        桃花紅艶暫時春(도화홍염 잠시춘) 복사꽃 붉고 고운 짧은 봄이라 
        撻髓難醫玉頰嚬(달수난의 옥협빈) 고운 얼굴에 주름지면 고치기 어렵다오
        神女下堪孤枕冷(신여하심 고침냉) 신녀라도 독수공방은 견디기 어려우니
        巫山雲雨下來頻(무산운우 하래빈) 무산의 운우지정 자주 내리네

    촌은 유희경은 「희증계랑(戲贈癸娘,)」이라는 칠언절구로 신선의 세계에서 깨가 쏟아지는 즐거움을 그리고 있다. 이들에게는 세속의 체면이나 권위는 필요치 않았다. 둘 간의 사랑과 시를 통한 화답이 얼마나 절정했으면 이 고장 출신의 시인 신석정은 이매창, 유희경, 직소폭포를 가리켜 부안삼절이라고 하였다. 황진이, 송도삼절이라 불리는 서경덕, 박연폭포처럼 말이다.
  • 이별 그리고 그리움
        이화우 흩날릴 제 울며 잡고 이별한 님 
        추풍낙엽에 저도 나를 생각는가 
        천 리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 하노매 

    400여 년 전 애절한 별리를 노래했던 연인들은 만남과 이별, 그리고 또 만남과 이별이라는 서러움을 시를 통해 들려주고 있다. 부안 기생 매창은 한시에 능했을 뿐 아니라 거문고 연주도 매우 뛰어났다. 배꽃이 푸른 하늘에 비처럼 떨어질 때 이별한 님이 가을이 짙어가도 소식 없으니 그이도 나를 생각하기나 하는지 애절함에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기 위한 수절가는 애절하기만 하다. 쓸쓸한 가을밤에 들려오는 거문고 가락이 더욱 시렸으리라. 유희경이 서울로 간 사이 임진왜란이 터졌다. 촌은은 의병을 일으켜 왜적과 싸우고 있던 터라 매창을 만날 겨를이 없었다. 
    매창은 촌은과 헤어진 동안 수십 편의 시를 통해 님에 대한 그리움의 한을 노래했다.

        春冷補寒衣(춘빙보한의) 봄날이 추워 겨울옷을 꿰매고
        紗窓日照時(사창일조시) 사창에는 햇살이 비치는구나 
        低頭信手處(저두신수처) 머리 숙여 손길 가는 대로 맡기니 
        珠淚滴針絲(옥루적침사) 옥루가 바늘과 실을 적시는구나 

    매창의 시「자한(自恨)」에서는 유희경이 떠나고 없는 봄은 너무나 추워 추울 때 입던 옷을 다시 꺼내어 수선하면서도 그리운 마음에 바느질이 되지 않아 눈물만 흘리는 서러움이 진하게 베여 있다. ‘오늘 아침 어머니 그리워 글을 쓰자 하나 / 글을 쓰기도 전에 눈물이 가득하구나’ 마치 남해로 유배온 서포 김만중이 어머니 생신날 지은 「사친시(思親詩)」를 연상하게 한다. 유희경 역시 전쟁 중이라 만나지 못하는 매창을 그리워하면서 여러 편의 시를 지었다. 

          娘家在浪州(낭가재낭주) 계랑의 집은 낭주[부안]에 있고 
        我家住京口(아가주경구) 이 몸이 사는 집은 서울이라네
        相思不相見(상사불상견) 서로가 그리워하지만 보지 못해
        腸斷梧桐雨(장단오동우) 오동나무에 비내리면 애가 끊기는구나 

    촌은은 「회계랑(懷癸娘)」에서 서울과 부안이라는 천리길 떨어진 곳에 살고 있어 서로 만나지 못하는 현실을 직시하면서 오동나무 잎에 떨어지는 빗소리에 애가 끊기는 고단한 사랑을 이야기 하고 있다. 이러한 시편들은 촌은집에 여러 편 실려 있다. 「도중회계랑(途中懷癸娘)」에서는 가인을 이별한 후 남쪽 하늘이 막혀 떠도는 자신의 어지러운 마음과 파랑새마저 소식을 전하지 않음에 벽오동에 떨어지는 찬비소리 들려 차마 견디지 못하는 심정을 노래하였다. 
    아내 외에는 단 한 번도 마음을 준 여자가 없었던 유희경, 기방 출입도 자제했던 그가 스물여덟이나 어린 매창에게 빠진 것은 둘 다 시대를 초월한 시인이었기에 가능했던 것일까. 그들은 첫만남부터 예사롭지 않았고, 전쟁으로 인한 이별 후에도 사랑의 노래를 천리길 머나먼 곳으로 주고 받았다. 임진왜란으로 이별해야 했던 두 연인은 15년만에 다시 만난다. 전쟁이 끝나면 곧바로 부안으로 달려가야 했을 유희경이 왜 서울에 남아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스무살의 꽃다운 처녀가 서른다섯이 될 때까지 독수공방 시킨 촌은의 심사는 무엇이었을까. 그 긴 청춘을 매창은 수절해야 했다. 기생이라는 신분임에도 정조를 지킨 그녀의 심사는 또 무엇인가. 전쟁이 끝난 후 매창은 수많은 명사들로부터 러브콜을 받지만 오로지 마음을 받친 늙은 시인만을 그리움으로 간직한 것이다.
  • 15년만의 재회와 매창의 죽음
    1592년 이별했던 촌은과 매창은 1607년 15년 만에 다시 만난다. 그 긴 세월 매창의 애간장을 녹였던 촌은이 63세의 노인이 되어 나타났지만 매창은 더 없는 사랑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그러나 유부남이었던 유희경은 오래 머물 수 없었다. 그 옛날 헤어지면서 열흘 만이라도 시를 논하면서 재회할 것을 약속하였기에 다시 만나게 된 것이다. 

          從古尋芳自有時(종고심방자유시) 예로부터 꽃향기 찾을 때 있다지만
        樊川何事太遲遲(번천하사태지지) 번천[당나라 시인 두목]은 어인 일로 이리도 더딘고
        吾行不爲尋芳意(오행불위심방의) 내가 가는 것은 꽃향기 찾아가는 뜻만 아니라
        唯趂論詩十日期(유진논시십일기) 오로지 시를 논하자던 10일의 약속을 좇음이라오 

    칠언절구「중봉계랑(重逢桂娘)」은 환갑을 지난 촌은 유희경이 매창과의 어렵고도 중요한 만남을 이야기 하고 있다. 다시 만남이 기녀 매창의 육체적 관계가 아닌 문학을 논하기 위해서라고 단정하고 있다. 15년 전 매창은 헤어지면서 열흘만이라도 더 머물며 시를 논하자고 애원한 적이 있었다. 촌은은 그 약속을 핑계로 재회하지만 마음 속에는 깊은 사랑이 샘솟고 있었으리라. 하지만 영원히 함께 할 수 없었던 그로서는 시를 핑계로 삼을밖에 없었던 것이다. 
    다시 기약없는 이별을 한 연인은 만나지 못한다. 그것은 3년 후인 1610년 매창이 38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었다. 촌은은 매창의 부고를 듣고 애도의 시인 「도옥진(悼玉眞)」이라는 칠언절구를 읊는다. 

        香魂忽駕白雲去(향혼홀가백운거) 향기로운 넋 홀연히 흰 구름 타고 가니
        碧落微茫歸路賖(벽락미망귀로사) 하늘나라 아득히 머나먼 길 떠났구나
        只有梨園餘一曲(지유이원여일곡) 다만 배나무 정원에 한 곡조 남아 있어
        王孫爭設玉眞歌(왕손쟁설옥진가) 왕손들 옥진의 노래 다투어 말한다오.

    매창의 죽음을 끝내 잊지 못해 양귀비의 이름을 빌려 지은 시이다. 이원(梨園)에서 현종을 모시고 예상우의곡을 연출하던 당나라 시인 백거이의 「장한가」. 그것은 바로는 현종과 양귀비[양옥진]의 불륜의 사랑을 아름답고 슬프게 묘사한 노래였다. 그도 역시 자신의 사랑이 불륜이었음을 인정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 다시 촌은이여, 매창이여
    남해 용문사에 소장된 『촌은집책판』에는 천민 출신의 위대한 시인 촌은 유희경과 황진이와 쌍벽을 이루는 버금가는 조선 최고의 여류시인 이매창의 사랑노래가 오롯이 담겨 있다. 
    유희경은 사대부들과 교류하면서 정업원 아래 있던 자기 집 시냇가 흐르는 개울가에 있는 바위를 침류대라 하고, 이곳에서 이름있는 문인들과 시로써 회답하였다. 그는 북악단풍 등 20경을 시로 지어 읊기도 하였으며, 수많은 문인들과 교류한 시집 『침류대시첩』을 펴냈다. 그는 당시 천인신분으로 시에 능했던 백대붕과 함께 풍월향도라는 모임을 만들어 주도하여 위항문학의 선구자가 되었다. 유희경은 서경덕의 문인으로 도봉서원을 건립하고 남언경이 사액을 받은 곳으로1623년에 도봉서원 옆 영국동 집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말년에 시를 지으며 도봉서원 앞 계곡에서 풍류를 즐겼으며, 계곡에는 암각글자가 새겨진 14개의 각석군이 분포하고 있다. 이 곳은 도봉산 계곡 중에서 경치가 아름답기로 이름났던 곳으로 바위와 바위 사이에 겹쳐있던 침류를 이름 그대로 맑은 시냇물을 베게 삼아 누워 즐길 수 있는 곳이라 하였다. 또한 남언경으로부터 문공가례를 배워, 상례에 특히 밝아 국상이나 사대부가의 상을 집례하면서 이름이 나기도 했다. 1592년 임진왜란 때는 의병을 일으켰으며 광해군 때 이이첨이 폐모의 소를 올리기를 간청하였으나 거절하고 그와 절교하였다. 인조반정 후 왕은 그 절의를 가상히 여겨 가의대부로 승진시켰다. 문집으로 『촌은집』, 저서로 『상례초』가 있다.







1800부터2000년대 인물



김병로

김병로 1607 ~ 1689

우리나라의 초대 대법원장으로 3·1운동 사건을 비롯하여 단천사건, 간도사건, 정의부사건, 광복단사건, 105인사건, 안창호사건 등 매년 100여 건에 달하는 변론으로 독립투사 구출에 진력하였고 북풍회(北風會)의 창설을 비롯하여 이상재·안재홍 등과 함께 신간회에 관여하여 직접적인 민족항쟁운동에 나섰다,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용추사에서 최익현의 열변을 듣고 동지들을 모아 순창읍 일인보좌청(日人補佐廳)을 습격하였다. 같은 해 창흥학교를 설립, 신학문을 가르쳤으며 1919년에 변호사를 개업하였고 광주학생운동, 6·10만세운동, 원산파업사건, 단천노조사건 등 관련자들의 무료 변론을 맡았으며, 1927년 신간회(新幹會)의 중앙집행위원장이 되었음. 1945년 한국민주당의 대표총무위원을 지냈고, 이듬해 남조선 과도정부의 사법부장, 정부수립 이후에는 초대 대법원장 겸 법전편찬위원장으로서 법질서 확립에 큰 공헌을 하였으며, 1963년에는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았다.
중일전쟁 이후 일제의 탄압이 심해지자 김병로는 양주근 노해면 창동리에 이주하여 대지도 사고, 집도 짓고, 3천평의 논도 마련하여 본격적인 농촌생활에 들어갔다. 해방 2년전에 천오백마리나 되는 양계도 했지만 닭 사료를 구하기 위해선 일본 관리들에게 아부 해야하는 상황에 처하자 닭을 전부 처분해 버렸다. 김병로가 창동리로 이주하자 홍명희, 정인보, 송진우도 따라서 창동리로 이주하였다. 
일제 강점기 고하 송진우, 위당 정인보와 함께 창동의 '세 마리 사자'라 불렸으며 도봉구 창동 731번지에 거주하였다.

언론압박 탄핵민중대회(1924~25 네차례 일어남) 당시 기자들에게 고문한 폭악한 경관 규탄결의를 하고 기념촬영한 변호인단과 기자들 앞줄 맨 오른쪽이 김병로, 그 옆이 허헌, 그 옆이 후세 다쯔지(布施辰治:일본인으로는 유일한 독립운동 서훈자), 그리고 그 옆이 이인 1956년 5월 대법원 연합부 법정 장면


송진우

송진우 1890 ~ 1945

대한민국의 독립 운동가이며 일제 강점기에 언론인, 교육자, 정치인으로 활동했다.
1919년 3.1만세운동에 가담한 혐의로 체포되었다가 풀려났고, 1920년에는 학교 설립 모금운동을 하다가 감시하던 경찰에게 붙잡히기도 했으며 그 뒤 동아일보사장,고문 등을 역임하며 언론활동에 종사하다가 1945년 광복을 맞았다. 광복 이후 여운형, 안재홍, 박헌영 등의 건국준비위원회 임시정부 법통론을 주장하며 참여를 거부하다가 9월 16일 한국민주당 창당에 가담했고 한민당 초대 수석총무에 선발되었다
그러나 1945년 12월 30일 신탁통치 찬반 문제를 놓고 신중론의 입장을 펼쳤다가 한현우 등의 총격을 받고 암살당하였으며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창동리 집은 가인 김병로가 창동리에 정착한 이후 마련하여 기거한 것으로 추정되며, 가인 김병로, 위당 정인보와 함께 창동의 '세 마리 사자'라 불렸으며 1938년에서 1945년까지 도봉구 창5동 281-1번지에 거주하였다.

1922년 3월 18일 중앙고보 제1회 졸업기념사진 왼쪽부터 인촌 김성수, 각천 최두선, 고하 송진우, 기당 현상윤이다 1929년 일본 동경에서 열린 제3회 범태평양회의에 참석했던 멤버들, 왼쪽부터 백관수,고하,윤치호,유억겸,김활란이다


정인보

정인보 1893-?

1893년 서울 명동에서 명문가의 외아들로 출생했으며 유명한 학자인 이건방에게서 사사했고 1913년 상하이로 건너가 박은식,신규식 등과 함께 동제사를 결성했다. 1945년 8월 광복 후에 국학대학의 초대 학장을 지냈으며 1946년<조선사 연구>를 저술했다
1948년 정부 수립 이후 이승만에 의해 초대 감찰위원장에 선임되었으나, 임영신의 독직 사건을 두고 대통령 이승만과 갈등을 빚고 물러났다
1950년 6·25가 일어난 그해 7월 31일 서울에서 공산군에 의하여 납북된 이후 사망 시기가 알려져 있지 않았으나, 공식 사망일은 9월 7일로, 북행 직후 황해도에서 폭격 피해를 당해 사망한 것으로 되어 있다
실심을 강조한 양명학 연구의 대가였고 한민족이 주체가 되는 역사체계 수립에 노력한 역사학자였으며, 감찰위원장 제직 시 광복절노래, 삼일절 노래 등을 작사했고, 1990년에 대한민국 건국훈장이 추서되었다.
창씨개명을 강요하는 일제의 강압을 피해 1940년 8월 창동리 731번지로 이주했으며 정인보옛집은 초가였으며 사랑방도 갖춰져 있는 조금 규모가 있는 초가였다고 한다. 
일제 강점기 가인 김병로, 고하 송진우와 함께 창동의 '세 마리 사자'라 불렸으며 도봉구 창동 733번지에 거주하였고 현재는 이 지역이 쌍문2동 587번지로 변경되었다.

대한순국열사유골봉환회장에서 김구 선생과 함께 (1946) 차녀 정경완의 결혼식 때 가족사진(1942)


함석헌

함석헌 1901 ~ 1989

1901년 평안북도 용천에서 출생하여 당숙 일형(一亨)이 세운 삼천재에서 한학을 수학하다가 1914년 덕일학교를 졸업하였다. 1916년 양시공립보통학 교를 졸업하고 그 해 평양고등보통학교에 진학하였으나,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이에 가담하여 학업을 중단하였다가 1921년 정주의 오산학교에 입학하였다. 그 때 안창호·이승훈·조만식으로부터 민족주의사상의 영향을 받았다. 1923년 오산학교를 졸업한 뒤 일본으로 건너가 1924년 동경고등사범학교 문과 1부에 입학, 1928년 졸업하였다. 재학 중에 일본인 무교회주의자 우치무라 간조의 성서연구에 깊이 영향을 받고 김교신·송두용·정상훈 등과 함께 무교회주의 신앙클럽을 결성하였다. 1927년 동인지 『성서조선』창간에 참여하여 글을 발표하기 시작하였다. 1928년 4월 귀국하여 모교인 오산학교의 교사로 부임하였다가 1938년 3월 사임하였다. 1940년 송산에서 김혁이 운영하는 송산학원을 경영하다가 계우회사건에 연루되어 대동경찰서에서 1년간 구류 생활을 하기도 하였다. 1942년 『성서조선』필화사건에 연루되어 다시 1년간을 서대문경찰서에서 미결수로 복역하였다.
사상가, 민권운동가 겸 문필가. 광복 후, 신의주 학생 의거 배후 인물로 지목되어 북한 당국에 의해 투옥되었다가 1947년 단신으로 월남하였다. 1958년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 라는 글로 자유당 독재정권을 통렬히 비판하여 투옥되었고, 5·16군사정변 직후부터 집권 군부세력에 날카로운 비판을 가하였다.
안창호, 이승훈, 조만식으로부터 민족주의 사상과 영향을 받았고 1970년 4월『씨알의 소리』를 창간, 민중운동을 전개하면서 반독재민주화운동에 힘을 기울였으며, 1976년의 명동사건, 1979년의 YWCA 위장결혼식 사건에 연루되어 많은 탄압을 받았음. 평생 일관된 사상과 신념을 바탕으로 항일·반독재에 앞장섰다. 주요 저서로는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1948), 『인간혁명』(1961), 『역사와 민족』(1964), 『뜻으로 본 한국역사』(1967), 『통일의 길』(1984) 등이 있다
쌍문동 81-78번지 함석헌 옛집은 함석헌의 차남 함우용씨 부부가 1978년부터 살던 집으로 1982년부터 타계하는 1989년 2월까지 거주하였다.

1976년 3월 1일 동교동 김대중 자택에서 민주구국선언 사건 연루자 출옥 후 발족된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을 위한 국민연합’지도부. 왼쪽부터 이문영,함석현,윤보선,김대중,예춘호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되었다가 석방되었을 때 모습(1958)


계훈제

계훈제 1921 ~ 1999

1921년 평안북도 선천(宣川)에서 출생하였고 1943년 경성제국대학 1학년 재학 중 일제의 학병 징집을 거부하다가 일본 헌병에 붙잡혀 지원병 훈련소로 압송된 뒤, 평양 인근의 채석장에서 중노동을 하면서 항일 독립운동 단체인 민족해방협동단에 가입해 항일활동을 하였다
1975년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투옥되고, 반독재 민주화 운동으로 인해 3차례 투옥된 것을 비롯하여, 1980년에도 김대중내란음모사건(김대중 재판)에 연 루되어 15개월 동안 도피생활을 하였고, 이후에도 재야 민주화 운동과 통일 운동에 앞장섰다
그러나 민주화 운동 과정에서 당한 고문 등으로 얻은 폐질환이 악화되면서 1995년부터 투병 생활을 하던 끝에 1999년 3월 사망하였다
그는 1990년 5월 도봉구 방학동 612-30번지로 전입하여 타계할 때까지 이곳에서 거주하였다

신성학교 시절 계훈제(중앙 트로피 든 학생) 문익환목사 출소기념 수유리 문익환 목사 자택에서(1987년 7월)


홍명희

홍명희 1888 ~ 1968

홍명희는 충청북도 괴산 출생으로 1910년 일본 도쿄다이세이중학〔東京大成中 學〕을 졸업하고 휘문고등보통학교 교사, 오산중학교 교장, 연희전문학교 교수 를 거쳐 24년 동아일보〉편집국장을 지냈다
27년 신간회(新幹會)를 창립하고 부회장이 되는 등 친일을 거부하여 옥고 를 겪었고, 20년대 초부터 유물론 철학과 민족주의에 관심을 가져 각종 민 족 해방운동에 참여하였다. 
1928년 11월부터 1939년 3월까지 〈임꺽정〉을 〈조선일보〉에 연재하여 명성을 얻었고, 광복 뒤 좌익계열의 조선문학가동맹 위원장이 되었으며 48년 남북연석회의 한국 대표였으나 북한에 잔류하여 49년 부총리, 61년 조국평화통일 위원장을 지냈다.
홍명희는 1939년 솔가하여 창동리 244-1번지로 이주하였으며, 궁핍한 생활에서도 일제에 협력하지 않았고, 1944년 충북 청원군 옥산면으로 다시 옮겨 가기 전 5년여를 창동에 거주하였다.

벽초 홍명희 둘째 아들 기무와 위당 정인보의 둘째 딸 정경완이 결혼했을 때  신혼여행지에서 모습 벽초 홍명희 장남 홍기문의 모습


전형필

전형필(1906 ~ 1962)

전형필의 본관은 정선(廷善), 자는 천뢰(天賚), 호는 간송(澗松)·지산(芝山)·취설재(翠雪齋)이고, 태어난 곳은 종로4가 112번지이다. 휘문고등보통학교를 나와 일본 와세다대학 법학과를 졸업했다. 대학 졸업 후 진로에 대해 고민 중이던 전형필은 휘문고보 졸업 이후에도 자주 찾아 뵙던 휘문고보 시절 미술교사 였던 고희동으로부터 “왜놈들 손으로 넘어가는 우리 서화와 전적을 지키는 선비가 되라”는 당부를 듣고, 오세창을 소개받는다. 3ㆍ1운동 민족대표 33인 중 한분이었던 위창(葦滄) 오세창(吳世昌ㆍ1864~1953)은 우리 문화를 보존하기 위해 역대 명인들의 글씨와 그림을 수집해 엮은 ‘근역서휘’(槿域書彙)와 ‘근역화휘’(槿域畵彙)를 전형필에 보여주었다. 오세창은 전형필에게 우리 선조들이 남긴 그림, 글씨, 책, 도자기는 우리민족의 혼임을 역설하면서 우리 문화를 보존하기 위해서는 우리 문화를 보는 눈을 키울 것을 권고한다. 그리고 전형필에게 산골물 ‘간(澗)’자와 추사 김정희 선생이 세한도를 그리면서 인용한 <논어>에 나오는 ‘세한연후 지송백지후조(歲寒然後 知松栢之後凋)-날씨가 추워진 후에야 소나무, 잣나무가 늦게 시듦을 알 수 있다-’에서 따온 선비의 지조를 상징하는 ‘송(松)’자를 합해 간송(澗松)이라는 호를 지어주었다. 오세창에게서 사사받으며서 서화수집과 감식을 배운 간송 전형필은 1932년 백두용이 인사동에서 경영하던 고서점 한남서림(翰南書林)을 인수하면서 본격적으로 고서화와 문화재를 수집했다. 특히 백두용으로부터 <조선실록>에 기록된 ‘훈민정음’ 관련 책을 찾아달라는 부탁을 받고 평생의 목표로 삼게 된다. 
1934년 성북동에 북단장(北壇莊)을 개설하여 본격적으로 서화작품과 조선자기·고려청자 등 골동품과 문화재를 수집하는 한편, 1938년 한국 최초의 사립박물관인 보화각(葆華閣)을 북단장 내에 개설하여 서화뿐만 아니라 석탑·석불·불도 등의 문화재를 수집·보존하는 데 힘썼다. 그의 수장품은 대부분 국보 및 보물급의 문화재로 김정희·정선·신윤복·심사정·김홍도·장승업 등의 회화작품과 서예 및 자기류·불상·석불·서적에 이르기까지 한국미술사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1940년대에는 보성고등보통학교를 인수하여 육영사업에 힘썼고, 8·15해방 후 문화재보존위원으로 고적 보존에 주력했으며 1960년 김상기·김원룡·최순우·진홍섭·황수영 등과 함께 고고미술동인회를 결성하고 동인지 <고고미술 考古美術> 발간에 참여했다. 1962년 1월 26일 자신이 태어난 집인 종로4가 112번지 자택에서 고혈압으로 급서했다. 향연 57세 유족으로 미망인과 두 아들을 두었다. 장지가 양주군 노해면 창동이었다. 1962년 대한민국문화훈장이 추서되었다. 1966년 보화각은 간송미술관으로 개칭되었으며, 북단장에는 한국민족미술연구소가 설립되어 미술사를 연구하고 있다.
간송 전형필의 장지인 ‘양주군 노해면 창동’이 오늘날 번지수로 하면 도봉구 방학동 429~431번지에 해당한다. 여기에 간송 전형필의 묘소와 1910년대 지어진 한옥이 있다. 일제 강점기 때 노해면 창동리에 간송 전형필 소유의 많은 땅과 논이 있었고 마들평야에서 생산되는 쌀을 저장하기 위한 커다란 곡식 창고가 노해면사무소에 인접해서 있었다.

수장품을 살피는 간송 전형필 간송전형필 수장품 : 지정문화재(국보 제70호 훈민정음 해례본 외 11점, 보물 제 579호 백자박신향로 외8점, 서울시 지정문화재 제28호 삼층석탑 외 3점) 서화 및 고서적(단원 김흥도, 혜원 신윤복, 겸재 정선, 오원 장승엄, 추사 김정희, 김독신 등)


김수영

김수영(1921 ~ 1968.)

종로 관철동 58-1에서 태어났으며 효제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선린상업학교를 졸업한 뒤 1942년 동경상대전문부에 입학 1943년 조선학병 징집을 피해 귀국하고 6.25 전쟁이 발발하여 의용군으로 징집되어 북으로 끌려가 1952년까지 거제도 포로수용소 생활을 하였다. 김수영 시인은 1954년 가족과 재회한 후 창동으로 이사하여 1956년 마포 구수동으로 분가한 이후에도 어머니와 도봉동 본가에서 양계를 하는 등 수시로 도봉동 본가를 찾으면서 작품 활동을 하였다. 현재 그가 태어난 관철동 집, 어린시절 살았던 종로6가집, 구수동집 등은 재개발로 남아있는 곳이 한 곳도 없으며, 도봉동 본가만이 시인의 체취를 맡아 볼 수 있는 곳으로 남아있다. 
김수영은 치열한 저항정신과 새로운 형식으로 자유와 삶을 노래한 시인이며, 1950년대와 1960년대를 통해 활약한 해방 이후의 대표적인 현대 시인이다. 그의 시와 문학적인 표현들은 해방 이후의 한국 현대시의 흐름에 중요한 의미를 갖는 상징적 가치를 갖게 되었으며 ‘자유’는 삶과 문학에 있어 가장 중요하고 예민한 행복의 기준이 되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유명한 시『풀』은 1968년 6월 불의의 교통사고로 타계하기 직전에 쓴 그의 마지막 작품(1968.5.29.)이자 그의 대표작 중의 하나이다. 
대표시로 『달나라의 장난』(1959년 간행), 『거대한 뿌리』(1974년 간행) 등 시집과 평론집 『시여 침을 뱉아라』(1975년 간행), 기타 번역서 등이 있다. 1981년 6월『김수영 시선』출간(지식산업사), 9월 『김수영 전집 1-시』, 『김수영 전집 2-산문』출간(민음사). 전집 출간을 계기로 <김수영 문학상>을 제정하고 김수영이 태어난 날인 11월 27일에 제1회 <김수영 문학상> 시상식을 하였다. 2001년 9월 최하림이 쓴 『김수영 평전』(실천문학사)이 10월 20일 <금관 문화훈장>을 추서받았다. 도봉산 도봉서원 아래쪽인 도봉동 산 107번지에 김수영의 시비가 세워져 있고, 시비 앞면에는 대표시 『풀』이 새겨져 있다(아래 사진). 2013년 11월 27일 구(舊) 방학3동 문화센터 자리(해등로82길 30)에 김수영문학관이 개관하였다.

김수영의 대표시 '풀'이 새겨진 시비 12살 소년단장 시절(1932, 맨 오른쪽이 김수영 시인 만내 여동생 송자의 졸업식 때 (1966, 왼쪽부터 부인,어머니,김수명,김수영시인, 남동생 수환)


전태일

전태일(1948. ~ 1970)

1948년 대구에서 가난한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나 끝없는 노동과 방황을 겪은 노동 자이다. 1964년 16세 때 평화시장에 ‘시다’ 즉, 미싱사 보조로 취직하여 열악한 작 업환경 속에서 꼬박 3년을 보내고 미싱사, 재단 보조 등을 거쳐 오랜 소원이던 ‘재 단사’가 되었다. 그는 이런 고단한 노동과 절박한 가난 속에서도 학업에 대한 꿈을 버리지 않고『중고등통신강의록』을 사서 보기도 하였으며, 아버지와 열악한 노동환경·임금문제·기업주의 횡포 등에 관한 이야기를 하다가 우연히 ‘근로기 < 전태일 > 준법’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는『축조 근로기준법 해설』이라는 책을 빚을 내서 구입하여 열심히 읽었다. 1968년 말 근로조건 개선을 위해 매주 한번씩 평화시장 부근 다방에서 10명 정도의 재단사들과 모임을 갖고 1969년 6월 ‘바보회’라고 이름을 지었으나, 바보회의 소문이 퍼지자마자 해고되어 평화시장에서 쫓겨나게 되고 막노동판을 떠돌다가 1970년 9월 다시 재단사로 취직할 수 있었다. 옛 바보회 사람들과 함께 ‘삼동친목회’를 만들어 노동청에 ‘평화시장 피복제품상 종업원 근로개선 진정서’를 냈다. ‘11시간 작업, 일요일 휴무, 정기 건강진단, 다락방 철폐, 환풍기 설치’ 등을 요구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11월 13일 근로기준법 화형식과 함께 분신자살을 감행하였던 것이다. 그의 분신은 흔히 한국 노동운동을 10년 이상 앞당겼다는 평을 받고 있다.
그가 청계천에서 근무하던 시절 피곤한 몸을 이끌고 아침 8시에 출근하여 밤 11시 마지막 버스에 맞춰 퇴근하던 그의 보금자리는 도봉구 쌍문동 208번지(현 56번지)였으며, 1985년 재개발되어 현재 쌍문동 삼익세라믹아파트 112동에 전태일 열사 동생 전태삼 가족이 살고 있다. 이 곳이 전태일 열사 옛집 자리였다고 한다. 
청옥고등공민학교 동창들과 함께 (오른쪽 두 번째가 전태일) 함석헌 선생과 함께한 이소선 여사와 평화시장 노동자들(1970년대)


문예봉

함경남도 함흥에서 출생하였으며, 어머니를 일찍 여의고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하는 어려운 유년 시절을 보낸 끝에, 배우였던 아버지 문수일을 따라 유랑극단에 흘러 들어가 연기를 시작했다. 무성 영화 <임자 없는 나룻배>(1932)에서 주인공 뱃사공의 딸 역을 맡아 나운규와 공연한 것을 계기로 일약 스타가 되었다. 두 번째로 출연한 영화가 조선에서 최초로 제작된 발성영화 <춘향전>이었다. 남편인 극작가 임선규와는 17살인 1933년에 결혼했다. 태평양 전쟁 시기에 문예봉은 전쟁을 미화하거나 지원병으로 참전할 것을 선동하는 어용 영화에 대거 출연함으로써 친일 행위에 가담했다. 남편 임선규가 1936년 7월에 내놓은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일명 홍도야 울지마라)가 서대문 충정로 동양극장에서 빅히트를 했다. 이로 인해 임선규는 난생처음 얼마간 경제적 여유를 갖게 되어 경성 교외에 아담한 집 한칸을 마련했다. 이것이 배우 문예봉의 집으로 쌍문동에는 1937년부터 살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임자없는 나룻배” 한 장면 (1932) <군용열차>(1938) 배우들, 왼쪽부터 독은기, 왕평, 문예봉





전설/민담/설화



쌍문동 효자이야기

지금의 쌍문동에 250여 전부터 전해 내려오는 효자, 효부이야기가 있다. 남궁 지(南宮 遲)는 어려서부터 부모 섬기기를 남과 달리 정성을 다하였고 부친의 병환이 위독하자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드리고 부친의 대변을 혀에 대고 병세를 살폈다고 전한다. 그리고 남궁 지의 처(妻) 하동 정씨는 출가할 때 의장과 경대를 하인이 돌아가는 길에 친정으로 되돌려 보내고 말하기를"나는 이미 출가외인이 되었으니 어찌 친정의 물건을 탐내어 부모공양에 손색을 입게 하리요"라고 하였다. 또 시댁에서도 효도와 우애를 갖추어 지극 정성으로 시아버지가 2년간 병환으로 누워 계실 때 정(鄭)씨는 해산한 아이를 남에게 맡기고 항시 시아버님 곁에서 시중하였다고 한다. 아들 남궁 조는 암회리(현 방학동)에 살면서 모친의 병환이 위독하자 옷차림을 한 번도 풀지 않고 정성껏 약을 달여 드렸고 밤에는 북두칠성을 향하여 자신이 대신 죽게 해 달라고 축원하였으며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드렸다고 한다. 남궁 지와 그의 처 하동 정씨 내외와 그의 아들 남궁 조의 행실이 조정에 알려져 효자문 쌍문(雙門)을 세우게 되었으며(1893년 교지) 현재 쌍문동(雙門洞)의 동명(洞名)은 여기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방학동 하마비

도봉산 방학동에는 하마(下馬)들(野)이 있다. 예전에 하마비(下馬碑)가 있었다 하여 생겨난 지명이다. 하마비는 대개 비석에 '대소인원개하마(大小人員皆下馬)'라고 새겨 누구나 말에서 내리게 한 것이다. 왕을 비롯하여 훌륭한 어른과 관련이 있는 곳에 하마비를 세워 그 어른에 대해 예의를 지키는 것이다. 하마들 뒷산에 덕수이씨 묘가 많은데, 조선시대 3대 정승이 살았다고 한다. 세도가 상당하여 가족이나 일가 친척은 물론 그 집에서 부리는 남녀 하인들도 위세가 당당하였다. 이 때문에 이 집 앞에서는 누구나 가릴 것 없이 타고 있던 말에서 내리게 되었고, '하마(下馬)'라는 지명이 생긴 것이다. 방학동에는 또 하나의 하마들 이야기가 있는데, 폭군 연산군 묘에 있었던 하마비이다. 비록 왕에서 쫓겨났으나, 왕을 지냈으므로 하마비가 세워졌다고 전한다. 연산군 묘가 있던 앞들을 역시 하마평(下馬坪)이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방학동 용바위

서울시 도봉구 방학동에 있는 천주교 공동묘지 자리는 이전에 용바위가 있었다. 펑퍼짐한 큰 바위로 한 가운데에 1m 정도가 파여 있었는 데, "여기서 용이 올라갔다.“, ”용이 살다가 하늘로 등천할 때를 기다리는데 기회가 오지 않아서 걱정을 하고 또 걱정을 하였다."라는 말을 마을 어른들이 하면 아이들은 “여기는 용이 살만한 큰 물이 없는데, 어떻게 살았을까?”라고 아주 궁금하게 여기곤 했었다. 그러면 어른들은 "용은 꼭 물에만 산 것이 아니라 산에서도 살았다.“, ”풍수지리로 볼 때 산등성을 용이라고 한다.“, ”용이 꿈틀꿈틀 하면서 아래로 내려온 것 같아서 붙인 이름이다." 라고도 하였으며, “용이 육지에서 올라갈 때는 큰비가 오는 날이다.”, “구름이 새까맣게 낮게 몰려들고 비가 오면 숨어 있던 용이 그 구름 속으로 쑥 올라간다.”, “올라가면서 꼬리로 바위를 치고 올라갔기 때문에 용바위가 생긴 것이다.”라고 하였으나, 천주교 공동묘지가 조성되면서 이 용바위를 없애 버렸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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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God Seed